무라카미 하루키 ㅣ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옮김 권남희

비채



*

아직 조그마한 꼬마인 나와

늙은 고양이는,

그다지 크기의 (혹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없다.


거의 비슷하다 해도 좋다.

우리 둘은 서로 뒤엉켜

마치 익숙한 흙탕물처럼


조용히 뒹군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오후에는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시간과는 또 다른 

특별한 시간이

고양이 몸 안에서 몰래 흘러간다.


*


길고 하얀 수염이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움찔하고 희미하게 떨린다.

정원 한 모퉁이에는 흰색과 분홍색 코스모스가

한데 어우러져 피어 있다. 그러니 계절은

분명 가을이다. 어딘가 멀리서 조그맣게 음악이

들려온다. 먼 곳의 피아노. 하늘에는 길게 늘어진 구름.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코스모스와 그 작은 음악, 그리고 세상의 

메아리 몇 개가 고양이의 시간과 함께 있다.

나와 고양이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고양이의 시간 덕분에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런 고양이를

좋ㅎㅎㅎㅎㅎㅎㅎ아한다.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



*

그 고양이는 폭신폭신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 그 털은 아주 옛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온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복잡한 무늬를 더듬으며

갓 만들어진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생명의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나는

세상의 사는 모든 고양이 중에서,

누가 뭐라 해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Posted by 버섯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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