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이상의 하루오


- 나는 하늘에서 안구가 터지는 상상을 했다. 수없이 했다. 구름 속을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거대한 태풍을 만난다. 기체가 상하좌우로 급격히 흔들린다. 그러나 문득 태풍의 눈으로 진입한다. 태풍의 눈은 고요로 가득하다. 그 고요의 한 가운데서 갑자기 안구가 펑, 터져버리는 것이다. 시야가 사라진다. 시야가 캄캄해지는 게 아니라, 시야라는 것 자체가 그냥 없어진다는 뜻이다. 상상력이 꿈을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상을 반복한 끝에, 나는 흔쾌히 꿈을 접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목적지들이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목적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목적지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_라고.


-깨어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ㄹ으켰다.


-이것은 밤과, 어둠과, 희미하고 연약하게 심장이 뛰는 물속의 풍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늑하고 고요해 보여서, 나는 내가 깨어 있다는 기척조차 낼 수 없었다.

  나는 물고기처럼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과장을 좀 섞어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선율의 조화가 거기 있었지. 아무리 사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음악을 듣는 동안 만큼은 악인일 수 없을 거야. 나는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으로 거의 5분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니까. 마치 세계 자체가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으로. 아니, 음악이 세계 자체가 되어가는 느낌으로.


-나는 말하자면 냉장고에 쌓여 있는 올ㄴ지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어.


-때로는 집주인의 모든 걸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중략) 단지 추측만은 아닌 무엇. 단지 오디오의 브랜드 때문만은 아닌 무엇. 책장의 배치라든가 배색이 맞지 않는 낡은 가구들 때문만은 아닌 무엇. 그 '무엇' 때문에, 나는 간혹 그의 모든 것을 이햐할 것 같은 기분에 빠지는 거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건 광막한 우주를 헤매다가 지구를 발견한 외계생물의 감정과 비슷한거야.



*올드 맨 리버


-퇴근 뒤에 알은 어둠이 깔린 이태원의 밤거리를 오래 걸었다. 서울의 밤하늘은 소란스러웠다. 별 몇개가 네온들 사이에서 반짝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지금이 밤이라는 것으 표시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은 시더래피즈의 밤이 그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나무 창틀이 있는 집과 니콜라와 마시던 맥주맛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은 아주 잠깐 그의 혀와 몸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알은 이 낯선 세계ㅔ 도착해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그는 이것이 아주 오래전에 지나간 다른 인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코인 세탁소라는 곳은 하나의 우주 같아. 이 세상이 코인 세탁소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니까.


-그건 아마도 따뜻하게 데워진 수프가 식탁 위에서 혼자 식어가는 일과 비슷한 게 아닐까.


-남자가 수화기를 든 채 알을 마주보고 있었다. 알이 지나갈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표정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 같았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비밀이란 건 이상한 방식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더군요.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바락바락 말하면 말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지갑을 훔친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Posted by 버섯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