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세계 중에서,


-하지만 대개는 이미 늦은 뒤지. 늙은 독재자의 심장은 차근차근 그 순간을 준비해왔을 거야. 전날 밤에, 전전 날 밤에, 또는 그해 봄이나 몇 해 전의 겨울에, 그리하여 아주 먼 시간 이전부터 말일세. 갑작스럽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지.

  사실 우연이란 게 뭐곘나? 그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겠나? 우연이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니까.


-13개의 계단이 지닌 의미를, 무지한 그들이 어찌 알겠나? 정확하게 13개의 단계로 이루어진 그 황홀한 세계를 말이야. 한 발을 들어 허공에 올려놓는 순간 또 한 발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세계. 한 발이 허공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다른 한 발이 온몸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 쾌락 속으로 한 발을 들이밀 때 고통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또 다른 발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매혹적인 일이 또 있겠나?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들리는가? 저기 먼 데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그래, 모든 이야기에는 결국 끝이 있다네. 끝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야기에도 끝은 있는 법이지. 뫼비우스의 띠에 끝이 없다고? 그게 트릭이거나 관념의 장난이라면 어떨까? 가위로 띠를 툭 잘라버리게나. 앞이 아니라 옆을 따라가도 좋을 거야. 거기 바깥이 있을 테니까. 영원히 회전하는 띠의 바깥으로 나가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인지도 모르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중에서,


-구체제의 정적인 분위기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건 뭐지? 왜 자꾸 불안해지는 거지? 사람들은 왜 싫어지는 거야? 그런데 오늘은 매우 바쁘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사람들은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눈을 떠보면 이중창문 너머로 바깥이 환했다. 흐린 날의 정오와 구별되지 않는, 그런 자정이 온 것이다. 그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몇 개의 사소한 문장들을 작성하거나, 낯선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한 문장씩 한국어로 옮겼다. 시간은 흘러갔다. 창문을 열면 희미한 자정과 구별되지 않는, 그런 아침이 와 있었다.


-안드레이는 햇빛이 날 때와 술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햇빛이 나는 날은 드물었지만, 술은 거의 매일 마셨다. 그래서 낮의 안드레이는 식물처럼 조용했고, 밤의 안드레이는 그렇지 않았다. 값싼 보드카를 마시고 많은 말을 했다. 혼자서도 말했고, 창문에게도 말했고, 나에게도 말했다. 말들에는 두서가 없었다. 나는 취한 그읨 ㅏㄹ을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술잔을 든 채 진지하고 추상적인 문장들을 쏟아냈다.

  이봐,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학자인가,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아름다운가, 무책임한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비밀스러운 기원이라는 걸 알고 있나.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부정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꽃은 그렇게 피어난다. 아름답고 또 위험하게. 레닌이 옳았는가, 마르토프가 옳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옳았는가, 베른슈타인이 옳았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로 갔느가? 지리놉스키는 멍청이이며, 자본주의는 혐오스럽다. 스피노자는 매혹적이고 무기력했으나, 일생 동안 어두치밈한 방에서 안경렌즈를 매만지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봐, 아름답고 잊히지 않는 단 한 줄의 소설을 써보게.

 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끔찍한 시를 말이야.

 이 악몽에 대해서.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또는 무엇의 악몽인지에 대해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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