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소설 / 문학동네 / 2016



* 너무 한낮의 연애


-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양희야,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한 몸을 사랑해, 너의 가병ㄴ 주머니와 식욕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우리가 어느 별에서


-고아원이 어려워졌으면 이제 아무도 옥수수를 안 찔까, 드물게 수녀님이 옥수수를 찔 때도 있었는데. 가끔 부엌에 가보면 수녀님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영어로 된 찬송가를 흥얼거리거나 아니면 반대로 무서운 침묵을 지키면서 일렁이는 불속을 지켜보고 있었어. 솥에는 아주 작은 것들, 겨울에도 불행히 살아남은 개구리나 몇몇 풀벌레들이 내는 연약하고 끈질긴 울음처럼 물이 자글자글 끓고. 그러면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긴장에 붙들려 있다가 그것이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지곤 했다. 그래, 고아원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돈을 부쳐주어야 해. 사라지지 않도록.


-이사한 첫날밤, 그녀는 그 어색하고 좀 민망한 화장실에 앉아보았다. 놀랍게도 별이 보였지만 그 별은 하늘에 있다기보다는 비탈진 골목을 따라 펼쳐져 있는 사람들의 집에 있었다. 늦게까지 불은 꺼지지 않았고 더러는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가 다시 꺼지기도 했다. 


*보통의 시절


-언니가 울지 말았으면 했다. 언니가 시끄럽게 코를 풀며 우니까 집중이 안 된다. 어쩌면 언니는 큰오빠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저렇게 소리를 내서 우는 건가. 언니는 큰오빠와 나 그리고 작은오빠가 사업도 망하고 취직도 못하고 이혼도 당하는 동안 단 한번의 부침도 겪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힘들 때 시원하게 도와준 적 없었고 호들갑스럽게 반응만 했다. 우리보다 더 느꼈다, 불안과 공포를. 그런 면에서 언니는 몽상가 기질이 있다. 불안과 공포를 몽상한다.


- 몽상은 노래처럼 리듬이 있는 것 같았다. 멈추고 연속되고 하면서 주기를 만든다.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도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심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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