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 정지원 지음 / 노인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제 10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작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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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낮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은, 어두워진 뒤에도 잠들지 않는 이들에게만 발견됩니다. 부드와 아늑이 처음 만났던 그날 밤에도, 누구에게나 너그러이 아름다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내려 온 세상으로 고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눈을 뜨고,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시각에 잠드는 바퀴벌레들에게, 그날의어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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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멈춘 것 같던 이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늑은 욕실 천장이 폭삭 무너져 조각조각 덜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나와 이나의 짝은 더듬이로 서로를 어루만지며 나란히 걸어 그대로 축제장을 빠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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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이지 않는 어떤 눈금 같은 거야. 세상을 재는 눈금. 생각해 봐. 파리는 인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자기 몸을 닦지만, 인간은 파리가 깨끗하다고 생각ㄱㄱㄱ지 않지. 사실 우리도 파리하고 마찬가지잖아. 우리가 몸을 얼마나 닦고 기름칠하는데? 그 무서운 고양이놈들하고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달랑 그거 하나잖아. 

-아무튼 그 눈금이라는 건 참 중요하지. 똑같은 일인데도 다른 눈금으로 재 보면 전혀 달리 보이니까 말이야. 인간들이 느림보인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시간을 재는 눈금이 우리보다 훨씬 크잖아. 우리는 인간들보다 조그만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에 눈금이 작고, 그래서 더 발리 움직이게 된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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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 어둠 속에 갇힌 종일

키 작은 날엔 조심할 것들도 많았는데

나는 용감하고 어리석었지

외ㅗ워 어디도 갈 수 없는 내일

내 키는 오래전에 멈추었는데

후회는 끝 모르고 계속 자라나네

나는 소독약 냄새 나는 수돗물을 먹고 살지

내 핏줄엔 잘 소독된 후회가 흐르고 있어

외로워 매일이 후회의 기념일

내가 지금보다 작던 날에

세상은 오늘보다 아름다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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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옆구리가 찢어진 건가요 그럼? 아니 어떻게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죠?

-굼금하지? 하하.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아, 맞다. 왜 인간들 먹이 중에 팝콘이라는 게 있잖아? 옥수수 알갱이를 튀겨서 만드는 거. 그 일 있기 전 내 몸통이 옥수수 알갱이 같았다고 하면, 그 순간은 팝콘 같았다고 할 수 잇을 거야. 몸통이 터져 나가면서 그 속이 가닥가닥 천 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었거든.

팝콘같이 터져 나간 바퀴벌레의 몸통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당분간 아무것도 못 먹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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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은 문득 사람들이 왜 샤워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온몸을 두드리는 물방울들은 그동안 둘이 저질러온 실수와 잘못들까지도 남김없이 씻어 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파도가 남긴 눈물들은 쉬지 않고 둘의 등껍질을 아프게 두들겼습니다. 그렇지만 그 물방울에 맞아 온 몸이 부서진다 해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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