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세계 중에서,


-하지만 대개는 이미 늦은 뒤지. 늙은 독재자의 심장은 차근차근 그 순간을 준비해왔을 거야. 전날 밤에, 전전 날 밤에, 또는 그해 봄이나 몇 해 전의 겨울에, 그리하여 아주 먼 시간 이전부터 말일세. 갑작스럽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지.

  사실 우연이란 게 뭐곘나? 그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겠나? 우연이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니까.


-13개의 계단이 지닌 의미를, 무지한 그들이 어찌 알겠나? 정확하게 13개의 단계로 이루어진 그 황홀한 세계를 말이야. 한 발을 들어 허공에 올려놓는 순간 또 한 발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세계. 한 발이 허공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다른 한 발이 온몸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 쾌락 속으로 한 발을 들이밀 때 고통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또 다른 발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매혹적인 일이 또 있겠나?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들리는가? 저기 먼 데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그래, 모든 이야기에는 결국 끝이 있다네. 끝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야기에도 끝은 있는 법이지. 뫼비우스의 띠에 끝이 없다고? 그게 트릭이거나 관념의 장난이라면 어떨까? 가위로 띠를 툭 잘라버리게나. 앞이 아니라 옆을 따라가도 좋을 거야. 거기 바깥이 있을 테니까. 영원히 회전하는 띠의 바깥으로 나가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인지도 모르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중에서,


-구체제의 정적인 분위기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건 뭐지? 왜 자꾸 불안해지는 거지? 사람들은 왜 싫어지는 거야? 그런데 오늘은 매우 바쁘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사람들은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눈을 떠보면 이중창문 너머로 바깥이 환했다. 흐린 날의 정오와 구별되지 않는, 그런 자정이 온 것이다. 그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몇 개의 사소한 문장들을 작성하거나, 낯선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한 문장씩 한국어로 옮겼다. 시간은 흘러갔다. 창문을 열면 희미한 자정과 구별되지 않는, 그런 아침이 와 있었다.


-안드레이는 햇빛이 날 때와 술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햇빛이 나는 날은 드물었지만, 술은 거의 매일 마셨다. 그래서 낮의 안드레이는 식물처럼 조용했고, 밤의 안드레이는 그렇지 않았다. 값싼 보드카를 마시고 많은 말을 했다. 혼자서도 말했고, 창문에게도 말했고, 나에게도 말했다. 말들에는 두서가 없었다. 나는 취한 그읨 ㅏㄹ을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술잔을 든 채 진지하고 추상적인 문장들을 쏟아냈다.

  이봐,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학자인가,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아름다운가, 무책임한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비밀스러운 기원이라는 걸 알고 있나.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부정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꽃은 그렇게 피어난다. 아름답고 또 위험하게. 레닌이 옳았는가, 마르토프가 옳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옳았는가, 베른슈타인이 옳았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로 갔느가? 지리놉스키는 멍청이이며, 자본주의는 혐오스럽다. 스피노자는 매혹적이고 무기력했으나, 일생 동안 어두치밈한 방에서 안경렌즈를 매만지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봐, 아름답고 잊히지 않는 단 한 줄의 소설을 써보게.

 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끔찍한 시를 말이야.

 이 악몽에 대해서.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또는 무엇의 악몽인지에 대해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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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섯씨


  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르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우너하게 노폐물을 배설햇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 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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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첫 시는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 '설' 이라는 시는 오은 시인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는 시집 (문학동네,2013)의 첫 시.... 이 시집의 어쩌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설, 익은 감자에서 내 표정--> ㅎ-ㅎ.

Posted by 버섯씨

*절반 이상의 하루오


- 나는 하늘에서 안구가 터지는 상상을 했다. 수없이 했다. 구름 속을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거대한 태풍을 만난다. 기체가 상하좌우로 급격히 흔들린다. 그러나 문득 태풍의 눈으로 진입한다. 태풍의 눈은 고요로 가득하다. 그 고요의 한 가운데서 갑자기 안구가 펑, 터져버리는 것이다. 시야가 사라진다. 시야가 캄캄해지는 게 아니라, 시야라는 것 자체가 그냥 없어진다는 뜻이다. 상상력이 꿈을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상을 반복한 끝에, 나는 흔쾌히 꿈을 접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목적지들이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목적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목적지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_라고.


-깨어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ㄹ으켰다.


-이것은 밤과, 어둠과, 희미하고 연약하게 심장이 뛰는 물속의 풍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늑하고 고요해 보여서, 나는 내가 깨어 있다는 기척조차 낼 수 없었다.

  나는 물고기처럼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과장을 좀 섞어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선율의 조화가 거기 있었지. 아무리 사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음악을 듣는 동안 만큼은 악인일 수 없을 거야. 나는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으로 거의 5분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니까. 마치 세계 자체가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으로. 아니, 음악이 세계 자체가 되어가는 느낌으로.


-나는 말하자면 냉장고에 쌓여 있는 올ㄴ지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어.


-때로는 집주인의 모든 걸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중략) 단지 추측만은 아닌 무엇. 단지 오디오의 브랜드 때문만은 아닌 무엇. 책장의 배치라든가 배색이 맞지 않는 낡은 가구들 때문만은 아닌 무엇. 그 '무엇' 때문에, 나는 간혹 그의 모든 것을 이햐할 것 같은 기분에 빠지는 거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건 광막한 우주를 헤매다가 지구를 발견한 외계생물의 감정과 비슷한거야.



*올드 맨 리버


-퇴근 뒤에 알은 어둠이 깔린 이태원의 밤거리를 오래 걸었다. 서울의 밤하늘은 소란스러웠다. 별 몇개가 네온들 사이에서 반짝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지금이 밤이라는 것으 표시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은 시더래피즈의 밤이 그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나무 창틀이 있는 집과 니콜라와 마시던 맥주맛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은 아주 잠깐 그의 혀와 몸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알은 이 낯선 세계ㅔ 도착해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그는 이것이 아주 오래전에 지나간 다른 인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코인 세탁소라는 곳은 하나의 우주 같아. 이 세상이 코인 세탁소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니까.


-그건 아마도 따뜻하게 데워진 수프가 식탁 위에서 혼자 식어가는 일과 비슷한 게 아닐까.


-남자가 수화기를 든 채 알을 마주보고 있었다. 알이 지나갈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표정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 같았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비밀이란 건 이상한 방식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더군요.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바락바락 말하면 말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지갑을 훔친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Posted by 버섯씨

1960년대에 씌어진 작품이란 걸 믿을 수 없는 현대적인 문장들과 소설 전개 방식이었다. 진짜 충격먹음 ㅠ 이제야 읽은 게 부끄럽기도 이제 읽은 게 다행같기도 하다. 어떤 기준 없이 내가 좋았던 문장들을 골라 필사했다. 그리고 여기에 옮긴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내다보니 이렇게 가끔 필사하는 포스팅만을 올리게 된다. 아 그리고 별 얘긴 아니지만 이 책에는 오타가 많아서 읽는데 좀 헷갈렸다. (첨보는 출판사의 책) 그런데 그게 또 왠지 재밌었던 것 같다. 오타인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지 사전을 검색하게 한 오타도 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에는 내가 또 다른 오탈자를 낳겠지. 가끔은 오타때문에 창피한 포스팅도 몇 개 있고 트위터에도 썼지만 붉닭볶음면 같은... 오타를 내고도 모르는, 몇 번을 반복해서 틀리는 단어도 있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오타는 블루투스 키보드 때문에 난다.

애인은 책꽂이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 그냥 좋아하는 책들 그리고 좋아하는 책들로 나누어 책을 꽂는데 만약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을 가장 좋아하는 책들에 꽂을 것이다. 아주 그냥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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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연습 중에서


-늦가을 햇살이 <윈도우> 밖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레지가 다가와서 <윈도우>를 배경으로 하고 꾸부리고 서서 빈 찻잔을 거두더니 살며시 비켜서듯 돌아갔다. 레지의 허리를 굽힌 <실루엣>이 아직도 남아서 아물거리듯 했다.


*건(乾) 중에서


-그 시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문득 애착이 가는 환상. 시체가 손발을 쭉 뻗고 엎드린 그 자세대로 공중을 둥둥 떠서 팔을 벌리고 서있는 아버지에게로 날아오고 있다. 공중을 느릿느릿 비행해 오는 시체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흩날리고 그럼으로써 시체는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잡된 요소를 바람에 실려 보내버리고 이제야 태어나기 전의 사람 아니 모든 것이 살았기 때문에 가장 가벼워져서, 공중을 나는 것이다.


-시체는 아제 괴로운 표정을 씻고 입가에 웃음을 싣고 있었다. 시체다. 시체가 우리의 차지가 된다. 우리의 손이 닿으면 시체는 웃음을 띤 채 살아날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묵묵한 자세로 입에 밥을 퍼넣고 있었다. 


-관 뚜껑을 닫기 전에 노파가 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체의 누런 얼굴을 손바닥으로 하염없이 쓸어주고 있었다. 노파의 가죽만 빼빼 남은 손이 느리나마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러고 있는 노파의 눈은 무겁게 감겨져 있었다. 반듯이 누운 시체 위에 관 모서리의 그림자와 바람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관이 내려지는 동안 노파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마 그 시체의 이름인 듯한 것을 몇 번이고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구덩이 속으로 근방에서 긁어모은 돌을 던져 넣었다. (중략) 나는 처음의 돌 몇 개는 남들처럼 천천히 던져 넣었지만 그러나 나중엔 힘껏 마치 돌팔매질 하듯이 던졌다. 내가 던지는 돌이 관에 맞는 소리는 딴소리와 뚜렷이 구별되어 울렸다. 


*역사(力士) 중에서


-대낮에 서 시까, 동대문의 바로 곁에 서서 행인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돌 한 개의 위치 변화에 관심을 보내지 않고 지나다닐 때, 옮겨진 돌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절망감이 마루 끝에도 마당 가운데서도 방마다에도 차서 감돌던 창신동의 그 집에서는 식구들에게 그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형체 없는 감동 같은 것을 조금씩은 깨우치고 영혼의 안정에 얼마간은 공헌할 수 있었던 나의 기타는 그래서 노인들이 우연한 한마디에서 갑자기 자기의 늙음을 발견하듯이 낡아빠진 모습으로 방의 구석지에 기대어져 있지 않으면 안된게 된 것이었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은 가장 좋았지만 어쩐지 어떤 부분을 필사해야 할지.


*싸게사들이기 중에서


-K에게는 책을 싸게 사는 비결이 있다. K는 사고 싶은 책에서 몇 페이지를 곰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찢어낸다. 그리고 다음날이나 며칠 후에 가서 그 책을 흥정한다. 그리고 페이지가 많이 찢겨져나간 책을 누가 사느냐고 배짱을 내밀어본다. 곰보는 대개 별 수 없이 양보하고 만다. 집에 돌아와서 찢어낸 페이지를 다시 그 자리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면서 K는 기분이 좋다.


*무진기행 중에서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低溫), ㄱ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海風)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地上)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이 가득한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나가 있고, 작은 숲이 있고, 다리가 많고, 골목이 많고, 흙담이 많고, 높은 포플러가 에워싼 운동장을 가진 학교들이 있고, 바닷가에서 주워온 까만 자갈이 깔린 뜰을 가진 사무소들이 있고, 대로 만든 와상(臥床)이 밤거리에 나앉아 있는 시골을 생각했고 그것은 무진이었다.


-그 소리는 길었다.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思考)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 갔다. 마침내 이 세상에선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 소리도 마침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할 것 같았다. 그때 소리가 갑자기 힘을 잃으면서 꺾였고 길게 신음하며 사라져갔다. 내 사고(思考)만이 다시 살아났다.


-그때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 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Posted by 버섯씨

시 한편이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이건 필사하기 무척 어려운데. 특히 공책에. 그런데 필사하지 않고 뭔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좋고 어렵고 복합적인 어떤 감정이...오늘은.


이준규 / 2015 / 울리포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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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p 그것은 언덕 위에 있다. 그것은 언덕 위에서 언덕 위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동아목공 앞을 지나가는 한 여자를 보고 있다. 그것은 동아목공의 대패다. 그것은 동아목공의 대패를 바라보고 있는 맥주 한 잔이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소음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것은 형성할 수 있는 가구와 같다. 그것은 시를 쓰고 있다. 그것은 한 겨울에 한 시를 쓰고 있다. 그것은 겨울의 벤치로 간다. 그것은 겨울의 공원으로 갈 것이다. 그것은 겨울의 한 공원으로 들어가 한 벤치에 앉을 것이다. 그것은 파랗다. 그것은 딱딱하다. 그것은 형이상학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만을 가진다. 겨울의 한 공원의 한 벤치에는 물렁한 것이 놓여있다. 그것을 앉아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누워 있다, 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것은 둥근 잔, 그러니까 흔히 머그 라고 부르는 다소 큰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덕 위에 있었다.

Posted by 버섯씨



김금희 소설 / 문학동네 / 2016



* 너무 한낮의 연애


-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양희야,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한 몸을 사랑해, 너의 가병ㄴ 주머니와 식욕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우리가 어느 별에서


-고아원이 어려워졌으면 이제 아무도 옥수수를 안 찔까, 드물게 수녀님이 옥수수를 찔 때도 있었는데. 가끔 부엌에 가보면 수녀님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영어로 된 찬송가를 흥얼거리거나 아니면 반대로 무서운 침묵을 지키면서 일렁이는 불속을 지켜보고 있었어. 솥에는 아주 작은 것들, 겨울에도 불행히 살아남은 개구리나 몇몇 풀벌레들이 내는 연약하고 끈질긴 울음처럼 물이 자글자글 끓고. 그러면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긴장에 붙들려 있다가 그것이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지곤 했다. 그래, 고아원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돈을 부쳐주어야 해. 사라지지 않도록.


-이사한 첫날밤, 그녀는 그 어색하고 좀 민망한 화장실에 앉아보았다. 놀랍게도 별이 보였지만 그 별은 하늘에 있다기보다는 비탈진 골목을 따라 펼쳐져 있는 사람들의 집에 있었다. 늦게까지 불은 꺼지지 않았고 더러는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가 다시 꺼지기도 했다. 


*보통의 시절


-언니가 울지 말았으면 했다. 언니가 시끄럽게 코를 풀며 우니까 집중이 안 된다. 어쩌면 언니는 큰오빠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저렇게 소리를 내서 우는 건가. 언니는 큰오빠와 나 그리고 작은오빠가 사업도 망하고 취직도 못하고 이혼도 당하는 동안 단 한번의 부침도 겪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힘들 때 시원하게 도와준 적 없었고 호들갑스럽게 반응만 했다. 우리보다 더 느꼈다, 불안과 공포를. 그런 면에서 언니는 몽상가 기질이 있다. 불안과 공포를 몽상한다.


- 몽상은 노래처럼 리듬이 있는 것 같았다. 멈추고 연속되고 하면서 주기를 만든다.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도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심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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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섯씨

사우르스


  빈집에 살고 있을 공룡 인형이여 안녕, 벌거벗은 너를 보았네


  플라스틱 눈으로 화학적인 생각을 했다


  두고 온 것보다 놓고 온 것이 더 많은 과거에 대해 생각하자 배가 고파졌다

  나는 자주 뒤척였어 너도 나를 껴안으면 부드러울까


  너와 나의 성분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고백하건대 죽은 솜을 껴안고 자는 일은 슬펐어

  죽지 않은 것을 겨안는 일은 어려웠으므로

  울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떨고 있는


  너는 왜 미래에서 오지 못하니


  파피루스가 마당에서 자라나고, 너는 그것을 먹었네

  부스럭거리는 잎사귀 먹고 가시나무 길렀네 


  뼈에 바람이 차올라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혼자서 채집을 나가지 못했다


  이빨 가는 소리 들린다 가시나무에 내려앉은 새들 부스러지고 행방불명된 공룡 인형 찾으러 떠나는


  끝없는 꼬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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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읽었다.

읽다가 도중에 덮는 시간이 더 많았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시집을 넘긴 순간들을 되감고 싶다. 

Posted by 버섯씨

샤워 / 정지원 지음 / 노인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제 10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작 / 2014





*

밤이 낮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은, 어두워진 뒤에도 잠들지 않는 이들에게만 발견됩니다. 부드와 아늑이 처음 만났던 그날 밤에도, 누구에게나 너그러이 아름다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내려 온 세상으로 고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눈을 뜨고,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시각에 잠드는 바퀴벌레들에게, 그날의어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

잠시 숨을 멈춘 것 같던 이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늑은 욕실 천장이 폭삭 무너져 조각조각 덜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나와 이나의 짝은 더듬이로 서로를 어루만지며 나란히 걸어 그대로 축제장을 빠져나갔습니다. 


*

-그래. 보이지 않는 어떤 눈금 같은 거야. 세상을 재는 눈금. 생각해 봐. 파리는 인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자기 몸을 닦지만, 인간은 파리가 깨끗하다고 생각ㄱㄱㄱ지 않지. 사실 우리도 파리하고 마찬가지잖아. 우리가 몸을 얼마나 닦고 기름칠하는데? 그 무서운 고양이놈들하고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달랑 그거 하나잖아. 

-아무튼 그 눈금이라는 건 참 중요하지. 똑같은 일인데도 다른 눈금으로 재 보면 전혀 달리 보이니까 말이야. 인간들이 느림보인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시간을 재는 눈금이 우리보다 훨씬 크잖아. 우리는 인간들보다 조그만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에 눈금이 작고, 그래서 더 발리 움직이게 된 걸지도 몰라.


*

외로워 어둠 속에 갇힌 종일

키 작은 날엔 조심할 것들도 많았는데

나는 용감하고 어리석었지

외ㅗ워 어디도 갈 수 없는 내일

내 키는 오래전에 멈추었는데

후회는 끝 모르고 계속 자라나네

나는 소독약 냄새 나는 수돗물을 먹고 살지

내 핏줄엔 잘 소독된 후회가 흐르고 있어

외로워 매일이 후회의 기념일

내가 지금보다 작던 날에

세상은 오늘보다 아름다웠는데



*

-으으... 옆구리가 찢어진 건가요 그럼? 아니 어떻게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죠?

-굼금하지? 하하.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아, 맞다. 왜 인간들 먹이 중에 팝콘이라는 게 있잖아? 옥수수 알갱이를 튀겨서 만드는 거. 그 일 있기 전 내 몸통이 옥수수 알갱이 같았다고 하면, 그 순간은 팝콘 같았다고 할 수 잇을 거야. 몸통이 터져 나가면서 그 속이 가닥가닥 천 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었거든.

팝콘같이 터져 나간 바퀴벌레의 몸통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당분간 아무것도 못 먹겠군.


*

아늑은 문득 사람들이 왜 샤워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온몸을 두드리는 물방울들은 그동안 둘이 저질러온 실수와 잘못들까지도 남김없이 씻어 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파도가 남긴 눈물들은 쉬지 않고 둘의 등껍질을 아프게 두들겼습니다. 그렇지만 그 물방울에 맞아 온 몸이 부서진다 해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Posted by 버섯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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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블로그 / 모든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 / 세상의 모든 귀여움을 사랑하는 사람
버섯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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