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을 눌러야 했다

밤새 안녕을 확인해야 했다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그대

미끄덩거리는 수프 속에서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다

버튼이 눌려지고

그대 향한 나의 발신이 시작되고 나면

당신은 죽었거나 살아있거나가 되는 것이고

나는 당신의 살아있음을 골라 잡을 수 없다

결별의 룰렛을 돌려놓고

당신이 숨어든 동굴 속에서

지금쯤은 안은 채 둥둥 떠올라 하늘에라도 오랐는가

혹은 아무도 모르는 내 그곳의 사마귀를 떠올리며 미소라도 짓는가

그러니 이렇다

이별뿐인 당신의 룰렛은

당신이 내게 돌아오는 날까지 홀로 돌아갈 것이고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한

확률로만 살아 있는 당신과 봄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 시방은

그대 향한 버튼 위에서

내 엄지손톱이 파르르 떨고 있지만

절대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밤새 안녕, 밤새 안녕


Posted by 버섯씨

무라카미 하루키 ㅣ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옮김 권남희

비채



*

아직 조그마한 꼬마인 나와

늙은 고양이는,

그다지 크기의 (혹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없다.


거의 비슷하다 해도 좋다.

우리 둘은 서로 뒤엉켜

마치 익숙한 흙탕물처럼


조용히 뒹군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오후에는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시간과는 또 다른 

특별한 시간이

고양이 몸 안에서 몰래 흘러간다.


*


길고 하얀 수염이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움찔하고 희미하게 떨린다.

정원 한 모퉁이에는 흰색과 분홍색 코스모스가

한데 어우러져 피어 있다. 그러니 계절은

분명 가을이다. 어딘가 멀리서 조그맣게 음악이

들려온다. 먼 곳의 피아노. 하늘에는 길게 늘어진 구름.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코스모스와 그 작은 음악, 그리고 세상의 

메아리 몇 개가 고양이의 시간과 함께 있다.

나와 고양이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고양이의 시간 덕분에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런 고양이를

좋ㅎㅎㅎㅎㅎㅎㅎ아한다.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



*

그 고양이는 폭신폭신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 그 털은 아주 옛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온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복잡한 무늬를 더듬으며

갓 만들어진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생명의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나는

세상의 사는 모든 고양이 중에서,

누가 뭐라 해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Posted by 버섯씨

  이병승 글 / 이담 그림/ 북멘토 / 2013

 


 일요일의 환한 아침 햇살이 식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아빠는 요리를 하느라 어지럽게 널린 그릇들을 대충 정리하고 제이와 마주 앉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주방 일은 아빠의 몫이었다. 아빠의 요리 솜씨는 형편 없었지만 제이는 투정을 부리지 않고 먹었다.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포크질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팔뚝에 북실북실한 노란 털들만 햇빛에 반짝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제이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제이는 에일리와 함께 마틴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고 또 달리는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눈이 쏟아졌다.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이 피부에 닿자 마틴도 제이도 하얀 피부로 변했다. 눈을 맞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백인이 되었다. 계속 달리자 이번엔 검은 눈이 내렸다. 검은 눈을 맞은 사람들은 모두 흑인이 되었다.

  마틴과 에일리는 눈을 맞을 때마다 똑같이 백인이 되기도 하고 흑인이 되기도 ㅎ했다. 서로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자동차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제이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옆에 나란히 날고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빠도 제이와 피부색이 똑같았다. 아빠가 제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제이는 차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아빠가 그 손을 꽉 잡았다. 영원히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

 

제이는 마틴이 얼마나 폭력을 싫어했는지, 어떻게 마약의 유혹을 뿌리쳤는지, 얼마나 생각이 깊었는지에 대해서 썼다. 스카와 있었던 일은 특히 자세하게 썼다. 그리고 언제나 친 형처럼 다정하게 조언으르 해 주었던 일들과 마틴 형이 읽은 수많은 책의 목록도 썼다. 학교 신문사 활동을 했던 일과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합창부를 선택한 이유 등에 대해서도 썼다.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일도 썼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커피 도넛 뚱보 형사가 놓쳤을지도 모를 것들에 대해서도 적었다.

 

*

 “나도 트레이본 마틴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원해요!”





Posted by 버섯씨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풀밭을 묘혈원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풀밭 따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우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그녀인 것처럼 풀밭은 단지 풀밭일 뿐이다. 처음에는 잡초도 뽑고, 잔디 깎기로 다듬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풀밭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집주인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후 풀밭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풀밭을 가꾸지 않는 방식으로 가꾸어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돼지에게도 언어가 있을까. (중략)

돼지의 언어를 안다고 돼지의 삶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둘은 풀밭에 나란히 누워 저 구름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하는 식의 대화를 한다. 갑자기 돼지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낀다. 실제로 불가능한 현실을 떠올릴수록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뀌고 현재에도 그녀가 돼지와 나 몰래 그렇고 그런 행각을 벌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하늘 저편에서 몰려오던 먹구름은 이제 하늘 이펴에 당도해 자신의 정체를 가시화시키고, 대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쓴다. 요즘은 시시각각 변모하는 자연 현상에 자주 압도당한다. 저 불가항력의 자연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이전까지의 삶이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지 않나 하는 자괴감에 빠젼든다. 자괴감은 자괴감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생각으로 전이된다. 얼마 전부터 나는 생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나의 생각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일 뿐이고 생각의 실체는 없다. 오로지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동하는 생각의 우스꽝스러운 궤적만 있을 뿐이다. 나는 되도록 생각하기 위해 애쓰면서 생각에 몰입하는 자신을 못 견뎌 한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과 생각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힘에 대해 좀더 생각을 해야 한다. 


Posted by 버섯씨

(스포없음)

나능 공포영화랑 재난 영화를 싫어하는데 이거는 그 둘을 짬뽕시킨 느낌이여

애인이 하도 졸라서 보러갔다옴.

좀비도 좋고 악마도 좋고 다 좋은데

어린 아이한테 악령 씐 모습은 징짜 보는데 넘 불편했당.

그 외에 무서운 장면은 별로 없었던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뭣이 중헌디' 라는 유행어도 영화 안봤으면 몰랐을텐데, 요새는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ㅋㅋ 지난 번 술자리에서 다 술취해서 언성도 높은 마당에 뭣이 중헌디 이 씨벌로마! 막 이러니까 이모가 깜짝 놀란표정으로 왜그러냐는 듯 쳐다보셔서 (원래 넘 얌전한 애들이라) 영화 대산데 유행어라고 오해마시라고 해명도 하고 그랬당. 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문화의 날인가 해서 영화 5천원에 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아가씨를 볼 예정이다. 이것도 사실 난 별루 안보고 싶은데...애인이 곡성 끝나자마자 조르고 있당. 난 사실 대중영화, 히어로영화, 애니메이션 이런 거 좋아하고 예술성 높은 영화는 잘 안봄...막상 보고나면 재밌긴 한데 보기 전까지 왜 보기 싫징... 영화는 뭔가 재밌어야 제맛(?) 이란 생각 때문인가.

암튼 그래도 곡성은 검은사제들 보다는 좀 덜 무서웠당...이게 결론인데. 이 영화를 두고 해석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 보고 집에와서 바로 네이버 검색도 해보고 그러니까 내가 그냥 지나쳤던 재밌는 것들 많더라능.

특히 할머니에 대한 해석이랑 신, 이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잼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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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섯씨

아아 너무 좋아. 표지 색상이 분홍분홍한 것이 시집 분위기도 그러하다. 나는 시를 잘 모르고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시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건 엄청 막연한 느낌같은 것이다.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빌린 시집인데 넘 좋아서 하나만 필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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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토크


  여기 오늘의 밀크빵을 좀 사왔어요, 들어봐요, 그는 물거품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구요? 긴 걸음과 짧은 속삭임, 당신의 러프 스케치를 넘기면, 비행기를 기다렸는데 누가 스케쥴 보드를 차곡차곡 잘라서 가져가더군요, 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구요, 로컬 버스를 타고 국경을 지나서 또 2박3일을 되돌아갔지요, 흙집이 보이는 나무 밑에서 새끼 염소처럼 그를 기다렸지만 포도주 통은 비어가고 금붕어 모빌들은 끝내 부셔졌다구요, 들어요, 주스 마셔요, 아무도 못 찾는 다락방, 악보를 그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긴 롤러코스터를 떠나보내요, 그 사람은 5월에만 문을 여는 카페 같아서, 새털 상자만 그리다가 얼굴에 물감을 바르고 그렇게 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와요, 우리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삽시다 내내 아이스크림을 먹어요, 저녁엔 하트가 그려진 오므라이스를 먹고, 거품을 날려보내고, 깨진 자리에 보석 스티커를 붙여보아요, 더 많은 날들은 안데르센 2층 숍에 들러 스카프를 구경해요, 그 누구도 우리보다 괜찮아 보이지만, 눈을 뜨면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잊어버리지만, 탁자가, 모자가 둥둥 떠오르도록 송풍기를 돌려요, 호수를 건너려 했지만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아직 모자랐던 거라 믿으며, 새끼 해마들도 달빛 속에 춤추는 이 테라스에서 같이 만든 그 노래, '우리끼리 손난로'를 밤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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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집으로 읽는 거랑 컴터로 타이핑 하는 거랑 느낌이 좀 다르네. 아무렴 좋아. 이렇게라도 자주 봐야지...

이런 느낌으로 소설을 하나 쓰고 싶다. 밀크빵 같은 분위기....그런 문장으로 

 

Posted by 버섯씨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강 교수님의 장편소설 하나를 읽고 나는 미술에 굉장한 관심이 생겼다. 관심...이랄까 동경. 그런 느낌인데. 그 소설의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 이다. 이후로 나는 미술을 하는 주인공을 종종 소설에 등장시켰다. 물론 늘 보기좋게 실패햐지만. 그리고 오늘, 장편소설 두 편을 더 읽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바람이 분다, 가라>와 <희랍어 시간> 이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지난주와 이번주에 거의 쉬지 않고 과제만 했다...그리고 한동안 책을 거의 읽지 못했고,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과외하는 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강 교수님이 멘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갑자기 교수님의 소설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서... 시험기간이라는 고3에게 두 편의 장편을 읽도록 시켰다. 다 읽어올거라는 기대는 없다. 실은 내가 읽고 싶어서 읽으라고 한 걸 수도... 암튼 두 소설은 짱이고 이거랑 이제 내여자의 열매 정도만 더 읽으면 한강 교수님의 소설을 거진 다 읽는 것이 된다. 지난 학년 1학기에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적응을 잘 하지 못했었는데... 1학년 때 수업을 들었던 윤성의 교수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ㅋ-ㅋ)와 한강교수님의 나긋한 목소리가 완전히 상반되었던 것이 한몫 했던 것 같다. 그리고...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교수님의 옆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아 윤성희 교수님의 소설도 좋아했다!;) 떨려서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 잊어버렸어...너무 떨려서. 아 또... 나는 한강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 작가의 말을 꼭 읽는다. 더 열정적이었던 나는 인터뷰 글이나 영상도 다 찾아봤지만. 작가의 말을 필사한...유일한 사람. 내가 생각하는 한강 교수님은좋은 교수님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좋은 작가다. 소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교수님의 태도와 뭐라하지...그 모든 것이 소설가 자체다. 내가 닮으려고 무척 애를 쓰지만 절대 닮을 수 없는 것. 아무튼 오늘도 마음에 드는 페이지에 포스트잇 붙여놨다가 포스트잇 다썼다...무시무시한 책. 조금만 필사 해야지.


작가의 말..

  어두워 지기 전에, 하얗게 얼어붙은 강을 전철로 건넜다. 강의 가운데는 얼지 않아서, 얼음 가장자리에 물살이 퍼렇게 빛났다. 이제 정말 이 소설이 내 손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바람과 얼음, 붉게 튼 주먹의 계절.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때로는 이 소설을 놓고 서성였던 시간, 뒤척였던 시간, 어떻게든 부숴야 할 것을 부수며 나아가려던 시간 들을 이제는 돌아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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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미세히 떨렸고, 두 눈은 노골적인 의심과 반감을 싣고 내 얼굴에 꽂혔다. 그 강한 감정으로 인해, 반쯤 죽은 사람처럼 건조하던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생생하게 살아난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내 뒤를 따라다녔다. 때로 앞서서 걸어가기도 했다. 잠을 잘 수 없는 밤, 좀처럼 새지 않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있다가 그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다리를 바꿔 꼬아가며 밤새 나를 건너다보고 있는 그것의 눈을, 나는 땀을 흘리며 뒤척였다. 때로 삼촌을 불렀다. 인주를 불렀다. 아니,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과속으로 달리는 택시 차창 밖으로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먹처럼 엎질러진 어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기둥들. 텅 빈 거리. 셔터를 내린 상점들. 얼어붙은 분수대. 거대한 납골당 같은 아파트 건물들. 소리 지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들. 


Posted by 버섯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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